예전 살던 곳을 나온지 벌써 8개월이 다 되어 간다. 가족이 이사를 나온 것을 감안하면 10개월이 지났다. 여전히 할머니의 창고에는 약간의 재고와 일에 쓰는 짐이 남겨져 있고, 매주 화요일에는, 브리즈번 집에 가지 않는 날에는, 항상 방문해서 쓰레기통을 내드리고 간단히 청소를 하곤 한다.

사람들은 내가 아주 친절하고 예의바르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매주 정해진 일을 하기 위해 방문하는 일 자체는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이유는 나 역시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을 내놓는 일 자체는 힘들지 않지만 일부러 방문해야 하기에 때로는 조금 부담될 때도 있다. 그러나 선뜻 차고의 한쪽 공간을 짐 보관용으로 내주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늘 최대한 시간을 내어 도움을 드리려고 한다.

호주에는 유난히 검트리 Gumtree가 많아(유칼립투스 나무) 그 가늘고 바삭마른 잎들이 떨어져 마당에 쌓인다. 처음에는 너무 낯설었지만 이제는 익숙하고 오히려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 낙엽의 향을 맡으며 호주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일반 주택의 경우 이 낙엽들이 지붕이고 마당이고 잔디밭에 쌓여 아주 골치거리라는 것. 혹자는 이게 쌓여 쉽게 불이난다고 걱정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아무리 치우고 쓸고 닦고 해도 끝없이 쏟아지는 낙엽을 정리하는건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일이고 너무 지저분해 보여 짜증도 난다.

예전에 그나마 한 살이라도 젊은 시절에는 자주 마당을 쓸고 정원 관리를 하던 할머니도 이제는 거의 체력이 안되어 집안에서 쉬거나 누워 지내시는 상황인지라 가끔 방문할 때마다 차고 안쪽을 청소하고 뒷마당 앞마당에 쌓인 낙엽을 청소해 드린다. 앞서 밝혔듯이 내가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매달 차고 사용료를 낼 수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해서 도움을 드리려는 의도다.

때로는 입맛이 없거나 속이 불편할 때가 있다 하여 사골곰탕이나(포장제품) 초코파이 등의 간식을 사가기도 한다. 한국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 생각을 해서라도, 누군가가 내 부모에게 좀 더 잘 대해주면 고마운 일 아니겠나 싶어, 할머니에게 가끔 먹을만한 것을 사드리는데 다행히 초코파이를 아주 좋아하시는 듯. 곰탕은 뼈에 좋다 하여 예전 무릎이 부러진 경험도 있고 얼마전 미끄러져 넘어져 허리를 다친 할머니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가져다 드리지만(햇반과 함께) 사실 사골곰탕이 뼈에 도움이 된다는 입으로 전해지는 내용이라 장담은 못하겠다.

지난번에는 마당 쓸고 정리해줘서 고맙다고 선뜻 돈을 내미신다. 흠… 이러면 내 성의가 오히려 반감되는데? 돈 싫어하는 사람 있을까만, 앞서 밝힌대로 내가 차고를 빌려쓰는 대신에 뭔가 보답을 하는 일인데, 할머니는 내가 돕는 일을 늘 고맙다며 용돈으로 대신하신다. 물론 그 돈은 간단한 먹거리를 사는데 보태기는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다. 호주에 온지 1년만에 그 동네로 이사를 했었고 엄한 이웃 할머니 때문에 많이 힘들었는데 이제는 둘째의 나이만큼이나 오랜 이웃으로 남은 분이니. 그렇게 인생의 한 쪽이 채워져가며 호주에서의 삶이 흐른다. 많지는 않지만 호주에 와서 여러 사람을 만나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다 좋은 분들 덕분이 아닌가 싶은 생각,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따뜻한 하루의 이야기다. *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나이가 들어가는 일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는 아니지만, 나의 생각은 지금 그대로, 좀 더 다양한 사고와 경험을 가진 상태로, 곁에서 느껴지는 모습은 조금씩 세월에 빛바랜 외모로, 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그 생각에 시간의 경험을 더해 사회적으로 바라보여지는 “숫자로서의 나이”만 변하며 인생이 그렇게 흘러간다.

나이가 더 들어 중장년을 넘어 노년이 되면 기력도 떨어지고 사회에서는 거의 밀려나게 되며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짧게, 어쩌면 인생을 살며 한번이라도 했을지 모를 죽음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며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인생은 참으로 짧고 그것을 너무 뒤늦게 깨닫는 것 조차도 인생의 과정이 아닐까.

이사를 나와서 이제 자주 보기도 힘든 할머니를 거의 한 달에 한 두번 보러 간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는 나도 깜짝 놀라는 상황을 접했다. 차고에 세워둔 할머니의 차가 상당히 심하게 파손된 것.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마침 할머니는 외출중이라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다시 방문해서 잠깐 대화를 해보니, 라운드어바웃(round about) 그러니까 원형 교차로에서 기다리던 중 반대편(호주 기준 우측)에서 차가 오지 않아 바로 출발을 했는데 그 앞의 차가 출발하지 않고 있어서 그 뒤를 박았다는 것. 보통 차를 출발하면 가속을 하게 되니 그 힘이 온전히 앞차에 전해지며 내 차의 보닛이 찌그러질 정도의 충격이 생긴 듯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상인 상황은 분명 아니다.

할머니는 왜 앞차가 가야 하는데 안 가서 사고가 생겼냐며 불평을 하시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는 100% 할머니의 실수일 수 밖에 없다. 운전을 할 때는 차가 오는 방향(우측)은 물론이고 앞과 다른쪽 옆 등 모든 사방을 살피면서 해야 하는게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나이가 들면서 집중력이 떨어진 결과다.

당분간은 보험 회사에서 빌려주는 차를 쓰고 있지만 차가 없이는 생활이 안되는 호주이기에 급하게 다른 차를 구해야 했다. 파손된 차는 이미 오래되어 보험 처리를 해도 비용이 너무 들어 회사에서는 폐차로 결정되었고 시장가 정도를 받는 선에서 보험 처리가 마무리 되면 할머니는 새로 차를 구해야 한다.

매번 남은 인생 벤츠 하나 뽑아서 타보는 것 어떠냐고 제안하곤 했는데 아껴쓰는 것이 생활인 할머니 성격에 그렇게 하지는 않으실테고, 그냥 적당한 중고차 하나 사서 타려는 계획이라 해서 차 구입을 도와드리기로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번 암 재발 진단 후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가끔씩 아파서 드러눕기도 하고 또는 병원 방문이나 기타 일정으로 시간이 맞지 않기도 하고…

할머니를 알고 지낸 것이 벌써 13년이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그 동네에 가서 살게 되었고 둘째가 태어나기 전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벌써 13년. 내 가족 특히 아이들에게 너무 잘 대해주는 할머니는 내게도 가족같은 분인데, 언제나 활기차고 건강하던 그 모습도 세월이 가면서 바뀌어 이제는 언제 어느 시점에 만나더라도 늘 지쳐있고 나이들고 힘없는 노년의 모습 밖에 남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살아계실지 모르지만 힘들지 않게 아프지 않게 조금이라도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지내시기를… *